목회칼럼
광야서신 10 ‘논쟁’이 가족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논쟁’이 가족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금요일과 토요일에 사역지기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참여하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올 한 해 우리교회 사역부의 사역이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섬기는 사역이 되길 기대합니다. 또한 질서를 따라서 순종이 있는 사역지기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 사역지기 수련회에서 이번 주 칼럼은 주제를 미리 예고했는데,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 사무실에 돌아와서 보니, 이번 주일이 지나면 명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 명절이 다가오면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한 주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추도예배’에 대한 글입니다. 전에 어떤 분이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전에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근래에도 그런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성경을 봐도 ‘추도예배’를 드려라 말라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제사문제까지 논의한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문화 속에서 나온 기독교적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과 선교사님들은 추모예배를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에 대한 말씀과 우리 민족의 조상에 대한 효 사상에서 찾아야한다고 봅니다. 성경은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이 아니라 우상입니다. 우리 문화는 부모나 조상이 죽으면 신이 된다고 믿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러니 조상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하지 말라고 한 것이 더 맞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내가 조상을 우상이라고 생각지 않으면 절해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질문이지만, 한다고 지옥 가는 것 아니지만 안하는게 유익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 문화에서 기독교인이 절을 할 때 나는 우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절하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아! 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절하는 것을 보니 조상을 신이라고 생각하구나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을까요? 드리지 않는 것이 맞을까요? 각자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나 안 드린다고 해서 드리는 사람을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더 큰 죄입니다. 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마치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아마도 많은 경우 두 가지를 고려해야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추모예배를 드리지 않으면서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조상을 다른 방식으로 의미 있게 생각할 대안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은 내 자녀들이 살아있는 늙은 나 조차도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추도예배를 통해서 부모 형제 가족 조상을 생각하는 것, 설령 그 조상이 예수를 믿지 않고 지옥을 갔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의 추억을 나누는 것을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실까요?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주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가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음으로 인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조상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해서 그 영혼을 실족하게 하거나 예수 믿는데 장애가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죄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부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같은 맥락에서 십일조, 주일성수, 믿음 안에서의 결혼에 대해서 한번 말씀드려봅니다. 요즘 인터넷에 올라온 위 주제에 대한 영상이 카톡을 통해서 교우들 안에 공유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누군가 저에게 십일조를 하는 것이 맞습니까? 안하는 것이 맞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먼저 그 사람이 묻는 동기를 보고 답하겠습니다. 그 동기가 정말 순수해서 묻는다면 저는 제가 십일조를 함으로 해서 누리는 유익을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저는 구약의 십일조와(제가 볼 때 십일조는 율법도 아니고 구약적인 가치가 아닙니다, 창조이야기가 구약에 나왔다고 이제는 신약시대니까 창조는 허구다라는 말과 같습니까?) 신약이 말하는 연보 정신을 엄밀히 비교해 볼 때 저는 구약의 십일조를 선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십일조만 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십의 구는 마음대로 써도 되고 십일조 외에는 다른 헌금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적 의미에서는 연보의 정신을 연구해보면 십일조 이상의 헌금을 드려야하고 십의 구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계산적으로는 십일조가 훨씬 부담이 적습니다. ^^;
반면에 어떤 분의 동기가 논쟁을 위한 것이라면 저는 십일조를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십일조 하지 않는다고 지옥가지 않기 때문이고 이미 나름대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논리를 가지고 나오신 분에게 제가 설명을 해봐야 논쟁 밖에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도 생각보다 세월을 보냈고 제게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논쟁보다는 한 사람을 더 구원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주일 성수 논쟁도 믿음 안에서의 결혼 논쟁도 마찬가집니다. 주일성수하지 않는다고 지옥 가는 것 아닙니다.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이단이어서 겁박을 한다고 주일 성수를 할 것도 아닙니다.
두 번째는 열매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기준을 삼는 것 중의 하나가 동기라면 또 하나는 열매입니다. 내가 그 선택을 했을 때 정말 내 삶에 열매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매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겠지만 정말 행복한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보면서 주일성수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 추도예배 드리는 사람과 안 드리는 사람, 십일조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 믿음의 결혼을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삶의 열매를 비교해보았을 때, 전자의 사람들이 많은 경우 더 행복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잘 안 믿으시는데 저는 여러분들이 추도예배를 드렸는지 안 드렸는지를 알 수 없고, 헌금은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장로님들의 권면으로 1년에 한번 중직자들과 교역자들에 대해서는 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명절 모이면 정치이야기 아니면 교회이야기가 밥상에 오를 것입니다. 이야기는 할 수 있겠지만 논쟁이 되기 시작하면 안한 것만 못합니다. 특히 교회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는 다르다고 말씀하지 말고 인정하십시오, 인구에 회자되는 교회의 문제가 마치 나의 문제, 우리교회의 문제로 받아드리고 맞다고 미안하다고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논쟁은 결코 가족이나 이웃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행복한 명절 되십시오.
이 명절을 앞두고 구약성경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유언을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