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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아메리카 대륙(캐나다)에서 돌아오자마자 지금은 아프리카 대륙의 작은 내륙에 자리한 르완다에 와 있습니다. 안 피곤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예수 믿고 누리는 축복이라 생각하며 감사하고 즐기려합니다. 사실 제 개인적인 필요도 있지만 무리해서 방문한 이유는 르완다의 수도인 키갈리에는 우리교회 목장에서 후원하는 이상훈 이송희 선교사부부, 박준범 백지연 선교사 부부가 학교 사역과 의료 사역을 하고 있는데, 최근에 우리처럼 병원과 게스트 하우스를 포함한 나누리 선교 센터를 건축한 뒤여서 건축한 뒤의 동병상련의 마음 때문입니다. ^^; 

르완다는 아프리카 중앙에 위치한 내륙국으로 면적은 우리나라 사분의 일의 크기에 해당하는 나라입니다. 반면에 인구는 천만이 넘어 인구밀도가 높은 축에 속합니다. 이 나라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말 중에 ‘천개의 언덕의 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개가 아니라 마치 국토 전체가 언덕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듯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아름다운 능선보다는 능선 아래 짙은 계곡이 눈에 먼저 밟힙니다. 아마도 이곳에 와서 이 나라의 슬픈 역사를 조금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문득, 이 나라도 좋은 지도자를 만나고 좋은 백성이 되어서 열강(독일, 벨기에)들로 부터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고, 그로인한 내전의 아픔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끝없이 펼치지는 계곡과 능선이 동족의 시체를 묻은 눈물의 골짜기가 아니라 물이 흐르고 숲이 우거진 아프리카의 스위스 같은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르완다는 거의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입니다. 저도 이상훈 선교사가 아니었으면 이름 정도나 알지 방문할 일은 없는 나라였을 것입니다. 그나마 조금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불리는 대학살 사건과 그것을 영화로 만들 “호텔 르완다” 정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노사이드(genocide)란 종교 인종 이념 등의 이유로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로, 인종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genos'와 살인을 나타내는 'cide'를 합친 것으로 '집단학살'을 뜻하는 말이 랍니다. 

르완다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에 대해 조금 말씀드리면, 1994년 르완다 내전 중에 벌어진 후투족의 투치족에 대한 집단 학살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1994년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가 그렇듯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지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벨기에는 르완다를 식민통지를 하기 위해서 분열을 통한 통치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즉 소수의 투치족을 지배계층으로 다수의 후투족을 피지배계층으로 나누어 버립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정말 다른 종족인지는 잘 모른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그 구분의 기준이 된 것이 코의 길이가 얼마 이상, 소를 소유한 마리수를 가지고 나누었다고 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이념이나 민족, 인종, 출신, 학벌 등을 이용하는 것과 이용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기도 하고 위험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당시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의 비행기가 격추되는 암살사건이 발화점이 되어 1994년 4월 6일부터 7월 중순까지 약 100여 일 간 약 80만 명에서 100만 명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사실 아직도 누가 미사일을 사용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망 수치는 당시 투치족의 약 7할, 전체 르완다 인구의 약 2할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좀 더 피부에 와 닿게 설명해 보면, 100일 동안 하루 1만 명, 1시간당 400명, 1분당 7명이 살해당한 것과 같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사건이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겐 아직도 현재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투치족 출신의 대통령이 권력을 잡았음에도 이들이 보복이나 덮음의 방법이 아닌 책임자들에게는 법적 책임을, 한 때 그들의 이웃이었던 단순 가담자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닌 잘못에 대한 사죄의 고백과 보상 그리고 용서라는 방법(가차차라는 전통적인 마을재판방식)을 통해 화해와 일치를 향해 나아가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나마 그 길이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인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 제가 방문한 기념관 마당에도 “기억하라 25”라는 조형물을 통해서 25년이 지났지만 ‘용서는 하되 결코 잊지는 말아야 함‘을 새기고 또 새기고 있었습니다. 문제인식도 중요하지만 문제 해결 능력의 중요함을 배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알아가는 중에 정말 충격적인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전 날까지만 해도 한 마을에서 이웃으로 살면서 저녁도 같이 먹었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원수가 되어 상대방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다는 사실입니다. 친구가 친구를, 친구의 부모를 살해하기도 하고,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급생이 동급생을,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신학교 신학생들 사이에서도, 같은 하나님을 믿는 한 교회성도들 안에서도, 성당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당시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들과 수녀들도 동참을 했다고 증언 합니다. 당시에는 가톨릭이 다수였으니 그렇지 개신교가 다수였어도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살기 위해서 교회나 성당으로 도망갔을 텐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다운 가족 여러분!
이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간의 죄성이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지금도 집단체면이나 광기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역사가 있었고 지금도 이런 그림자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집단체면이나 광기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무엇보다 집단 광기가 꼭 큰 집단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개인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광기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대한 모습이 나타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두 가지 양상을 조심스럽게 나누어 봅니다.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은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지금 심각한 상황이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교회가 지금까지 정말 힘에 부치도록 열심히 잘 해 왔지만 혹 그 열심이 어느 날 지나친 자기 확신이 되어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까봐 예방차원에서 더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하자는 의미에서 나누는 말씀입니다. 또한 혹 어떤 분들 중에 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이런 모습이 있다면 은혜로 섬기고 믿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입니다. 그리고 비싼 댓가를 지불하고 여기까지 온 담임목사로서 외적으로만 볼 때 볼 것이 많은 캐나다에 비해서 볼 것이 적은 르완다에서 보이지 않는 내면을 보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 

제가 목회를 하다 보니, 신앙생활을 나름대로 잘 하다보면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경험이 반복되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자기 확신이 되어 내가 하나님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신앙의 경험만이 정답이 되어 있고, 나와 다른 사람의 충고도 용납도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지만 실패의 경험이 쌓입니다, 그것이 주는 아픔이 도를 넘어서면 자기보호 내지는 방어적이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염려한다는 이름으로 판단과 불평으로 시간을 낭비하든지 아니면 또 다시 실패의 반복이 두려워서 뒤에서 주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주는 기쁨도 회복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두 신앙의 모습을 ‘그리스도인의 폭력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어쨌든 둘 다 과거에 매여서 ‘지금 여기 공동체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진짜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자신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복음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 보다 앞선 지나친 자기 확신도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람은 못 믿겠어 하고 주저 하는 자기 보호도 결국 누군가가 건강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한 말일 수 있지만 저는 이것을 믿음 좋은 ‘기독교인의 폭력’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폭력을 행사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르완다에 도착해서 오늘까지 계속해서 제 마음에 맴도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해서 우리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길 바라는 마음에 긴 글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이야기는 다음 칼럼이나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 세 번째 설교 시간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다운 가족 여러분!
많은 생각 중에서 특별히 이 내용을 칼럼으로 나누는 이유는 다음 주가 추석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혹여 라도 먼저 믿었다는 이유로, 또는 우리가 좀 성경적인 교회에 대해서 조금 알고 섬김과 순종을 보여주고 있다는 이유로 믿음이 없는 이웃이나 가족들 앞에서 믿음 좋은 기독교인의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다. 부디 겸손하게 말보다는 몸으로 섬기시고 누군가 당신은 왜 그렇게 믿느냐고 물어보시면 확신에 찬 말보다는 성경을 보니 그렇게 믿어야 할 것 같다는 정도의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로 말씀하시는 것이 더 주님이 원하시는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일거라고 봅니다. 주일 잘 보내시고 추석이 지난 후 주일날 뵙겠습니다. 저는 추석 당일 새벽에 울산에 도착합니다. 여러분들의 섬김과 사랑, 그리고 여러분들의 기도로 살아가는 박목사 드립니다. 곧 안식월을 끝내고 긍휼과 평안을 가지고 제가 있어야 할 자리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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