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요즘 새벽에 묵상하는 전도서 말씀처럼, 우리 공동체 안에도 피하고 싶은 인생의 고난이나 갈등을 겪는 분들을 봅니다, 이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 삶의 결과는 대부분 내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잘 될 때 교만하지 않는 선택도 중요하지만, 인생은 무엇보다 고난 앞에서의 선택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은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믿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최근에 선택한 것은 제가 섬기고 있는 ‘울산중구지역모임“이 인원이 너무 많아서(11개 교회 22명) 분가는 아니고 2개 조를 나누어야 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이런 경우 대부분 ’기질‘과 그 기질이 만나서 형성된 ’행동유형‘에 따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최악은 ’감정‘입니다.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형성된 상처나 그로 인한 ’방어기제”가 기준이 되는 경우입니다. 물론 그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최종적인 ‘선택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선택이 좀 더 “구원과 거룩”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고, 공동체적으로는 좀 더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원하지 않는 사건이 생기면, “왜 이런 일이?” 아니면 “누가 옳고 그런지”를 따지는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왕 생긴 일이라면 그 사건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구원과 거룩’을 이룰 수 있다면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그 일을 통해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을 이루어 갈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제게 가르쳐 주신 분은 이번 주 주일 설교를 하러 오시는 최영기 목사님이셨습니다. 무거동에서 교인 숫자가 늘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임할 때 건축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분립’이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는 한 마디로 질문하셨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의”인지 아니면 영혼구원하여 제자삼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제 “의”가 밑바닥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후에는 많은 선택을 해야할 때 저는 마지막으로 저 기준을 적용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랑하는 다운 가족 여러분!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깁니까? 집안 형제들 안에 문제가 생기고, 일터에서 문제가 생깁니까? 목장안에서 문제가 생깁니까? 교회 사역이 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음이든 태도든 어떤 행동을 선택을 해야함을 느낍니까? 그럴 때 이 두 가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내가 또는 내 자녀가 내 형제가 우리 목원과 직장 동료가 어떻게 더 구원과 거룩으로 나아가길 원하실까? 또한 어떤 것이 좀 더 영혼 구원하고 제자 삼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이 기준을 가지고 ‘심방이든’ “권면의 말이든‘ 또 찾아가야 할 때인지 기다려 주어야 할 때인지를 결정하면 도움이 됩니다. 최악의 경우, 목원이 목장이나 교회를 떠나려고 할 때 정말 가슴 아프지만, 그럼에도 이 사람이 떠나는 것이 그 사람의 구원과 거룩이 도움이 되면 보내주고 아니다 싶으면 한번 더 찾아가서 진심으로 권면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정말 가슴 아픈 사건들 앞에서 자녀들을 위해서 이렇게 하는 부모, 목원들을 위해 이렇게 목자, 이런 기준으로 담임목사의 권면을 받아들여 힘들지만 구원과 거룩의 방향으로 순종하는 다운 가족들이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교회를 바라볼 때도 아마도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 저렇게 하는 것이 좀 더 영혼 구원하여 제자삼는데 도움이 되기에 하셨나? 한번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최근 행정동 왼쪽 벽에는 다운공동체교회 1대, 2대 목사님과 3대 목사인 저의 사진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이 공동체의 구원과 거룩 더 나아가 영혼구원과 제자삼는 사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고, 언젠가 만날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더불어 담임목사로서 명분보다는 한 개인의 구원과 거룩에 도움이 도움이 된다고 믿어서 삶공부와 관련하여 한 가지 룰을 바꾸려고 합니다. 최근에 목자(녀,부)들과 ’확신의 삶‘과 ’행복한 삶(구,행복의 길)‘을 목원들이 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확신의 삶은 신앙적인 습관과 관련된 내용이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데, 행복한 삶은 자신의 삶을 오픈 해야 하는 과목이어서 그런지 이런 저런 이유로 주저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 사모인 제 아내와 하기를 원하는 분들이 있기도 하고, 아내가 볼 때 자신과 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내가 주관하는 ’부모기도모임‘이나 ’경건의 삶‘을 하신 분들 가운데서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매주 만나서 기도를 함께 하다 보니 그런 마음이 서로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웃 교회에도 알아보니 그런 경우가 있어서 두 가지 중 선택하게 한다고 합니다. 즉, 행복한 삶은 자신이 속한 목장의 목자 목녀나 목자들의 경우는 초원지기와 하든지 아니면 담임목사 사모와 하도록 길을 열어두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목자 목녀나 초원지기와 하면 안 되는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너무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기에 이 정도로만 해보려고 합니다. 사모는 어느 목장에 소속된 것이 아니기에, 한 성도가 구원과 거룩을 이루도록 하여 궁극적으로는 목장의 영혼 구원과 제자 삼음에 도움을 주려고 하기 때문에 허락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한 영혼이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목자 목녀님들을 비롯하여 우리 공동체의 성숙함이 이 일에 드러나길 소망합니다. 서로 양해하고 부탁도 하면서 구원과 거룩이 더 나아가 영혼구원하여 제자삼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그것이 안된다면 언제든지 멈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이 글이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생각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