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3월19일 수요기도회 때 인용한 저의 리더인 최목사님의 권면, '가정교회 변증가로의 사명'에 순종하여 가사원 홈피에 올린 글입니다!'
최 목사님으로부터 메일 한 통이 왔습니다.
“박종국 목사님, 난 아주 오래전부터 박 목사가 가정교회 정신을 글로 표현하는 일종의 가정교회 변증가가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내가 이 역할을 해 왔는데, 나이가 있기 때문에, 이런 역할을 나 대신 맡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최 목사님의 메일 이후, 넉 달을 고민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두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째, 이 일이 필요한 일인가? 필요하다면 분명한 명분을 주십시오!라고, 두 번째는 이 일을 꼭 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 해야 한다면, 비판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작년 연말 담임목회 20년을 채우고 난 뒤, 선물처럼 두 달 동안 국내 가정교회를 비롯하여 호주와 미국 가정교회를 섬기면서, 가정교회 동역자들과 교제를 나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만남 가운데서 명분을 찾게 되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가 보였습니다.
먼저, 어느 한 사람도 가정교회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가정교회를 만난 것이 축복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가정교회가 여전히 이 시대의 대안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가정교회를 더 잘하고 싶어 했습니다. 가정교회의 정신과 그릇으로 표현되는 네 기둥 세 축과 관련하여 아쉬움이나 수정을 이야기한다든지,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가정교회 세 축 네 기둥이 성경에 근거해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성경대로 해 보자고 찾아낸 것이 가정교회 세 축 네 기둥이라면 세상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아직은 유효하기 때문일 거라고 봅니다. 두 번째는 아직 세 축 네 기둥을 완전히 문화적으로 정착시킨 교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아직도 세 축 네 기둥은 대부분의 가정교회가 이루어가야 할 목표라고 봅니다. 설령 언젠가 수정이나 보완이 필요할 날이 올지 몰라도 아직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두 번째는 ‘안타까움’이 보였습니다. 어느 교회가 가정교회를 잘했었는데,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끝에는 결국은 팔로우와 리더들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비판이 아니라 염려였습니다.
가정교회를 전환하고 지금까지 해 보니,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쉬운 것이 있다면, 세 축의 셋팅이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교회들이 목장과 삶공부와 예배는 세팅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교회가 가정교회의 역동성이나 열매가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정신인 네 기둥이 그 세 축 안에 얼마나 스며들었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다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 됩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리더십과 가정교회 문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힘든 것은 리더십입니다. 그래서 리더십이 가정교회 세 축 네 기둥 모두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정교회의 네 기둥의 마지막이 섬기는 리더십입니다. 세 축도 사실 세 축이 아니라 그 중심에 담임목사의 섬김의 리더십이 있습니다. 그만큼 가정교회에서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중직자나 초원지기 목자들의 리더십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섬기는 리더십으로 이야기하지만, 그 외에도 영적인 리더십도 필요하고, 보편적인 리더십도 필요합니다.
담임목회를 6년을 한 뒤인 2011년 가을부터, 풀러에서 안식년을 가졌습니다. 가정교회로 전환한 지는 3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당시 들은 수업 중에, 선교역사학자인 폴 피어슨 교수의 수업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분은 ‘선교학적 관점에 본 기독교 선교운동사’라는 책으로 목회자들에게 많이 알려진 분입니다. 이번에 다시 이분의 강의 노트를 꺼내서 읽어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분은 9가지 선교학적 원리를 가지고 선교운동이나 교회갱신운동의 시작과 부흥, 그리고 쇠퇴를 연구하는 분인데, 당시 가정교회의 태동이나 확산이 거의 이 9가지 원리와 맞아떨어졌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당시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교학적 원리에 따라 태동하여 부흥했던 선교운동이나 교회 갱신과 확장 운동이 어떻게 역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조직과 건물’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이미 가정교회는 최 목사님의 예견으로 잘 극복했다고 봅니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시간이 가면서 지도자들에 의해 원래의 가치와 목적을 상실하고 역행하는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지도자라함은 저를 포함하여 가정교회 혜택을 입고 앞장 서 일하는 2,3세대 리더들 일것입니다.
글을 써야겠다고 순종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가정교회가 북미에서는 30년(1993년 휴스턴 서울교회 가정교회 출범)이 넘었고, 한국에서는 2000년 3월 열린문교회가 처음 시작했으니 20년이 조금 넘으면서, 저를 포함하여 우리가 혹 이런 상황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것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유동성, 다양성, 신축성입니다. 2019년 최 목사님의 가사원장 은퇴와 맞물려 가정교회에서 나온 화두는 유동성, 다양성, 신축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적용과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 시도 자체는 필요했다고 봅니다. 그러고 약 6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적용돼야 할 것에 적용됐는지 한 번쯤 점검이나 평가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것들을 적용하지 말아야 할 것에 적용한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할 겁니다.
동시에 이제부터 가정교회의 적은 가정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위기의식이 느껴졌습니다. 가정교회의 특징이 있다면, 전환이 어렵긴 해도 전환하고 나면, 초반에는 분위기도 살아나고 영혼 구원의 열매도 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되면 멈추거나 퇴보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원인은 리더십의 한계와 더불어 가정교회가 문화가 되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화는 곧 세계관의 반영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었습니다. 최 목사님이 가정교회 운동을 한국에서 신학을 하고 한국교회에서 시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겁니다. 저는 지금과는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었다고 봅니다. 세계관이 주는 영향 때문입니다. 북미의 문화가 모두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분명 북미의 변두리 휴스턴에서 유교와 기독교 문화 모두를 경험한 최 목사님과 휴스턴 서울교회 리더들에 의해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이 지금의 가정교회의 문화를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치 사도행전이 결국 히브리파 문화와 헬라파 문화를 모두 경험한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 쓰여진 것과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한국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목회자 자신도 그리고 평신도 리더들에게도 두 문화의 경험과 충돌을 느끼면서 그 사이에서 성경적인 가치관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휴스턴 서울교회 평신도 세미나에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목자들을 보내는 이유가 이런 갈증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휴스턴 서울교회와 같은 정신과 문화를 가진 교회들이 속히 한국과 더불어 이곳저곳에 생겨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조심스럽지만 너무 일찍 다양한 연수나 세미나의 문을 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지금으로서는 관계된 교회들이 스스로 그 기준이 가정교회 정신뿐 아니라 문화까지도 생각하여 진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상이 힘들지만, 제가 글을 쓰기 위해 쌓은 명분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왜 나일까’하는 것인데? 2014년부터 부리기 쉬운 종이 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담임목사로 헌신한 후 20년이 지나면서 돌아볼 때, 왜 실패한 목회자의 아들을, 그래서 가족들도 저 자신도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목회의 길을 가게 했을까 생각했을 때, 그 실패한 환경을 통해 몸에 베인 직관과 같은 것이 제게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큰 목회는 아니어도 바른 목회에 대한 조그마한 기여를 원하신 것이 아닌가 싶어,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힘들면서도 그것 때문에 가정교회를 만났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담임목회를 앞두고 캐나다, 미국, 한국교회를 미친 듯이 리서치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들 중에 기억나는 교회가 있습니다. 갈등과 비전을 조율하고 점검하는 역할을 하는 교역자를 둔 교회입니다. 예를 들어 교역자실 안에 갈등이 일어날 때, 이 사람이 양쪽 이야기를 듣고 나름 조사를 한 후에,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리면, 수용하기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인상 깊게 남아있습니다. 심지어는 담임목사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갈등의 조정 기준은 그 교회의 가치와 방향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인간은 스스로의 문제를 잘 보지 못하거나 결국 그 가치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정교회에 입문하고 아주 인상 깊은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가정교회에 입문할 즈음에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가정교회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최 목사님은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약간은 고무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처음부터 가정교회는 아웃 사이더가 될 때 생명력이 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폴 피어슨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선교적 운동은 약자의 복음이 강자에게 전해질 때 진정한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진다는 주장이 옳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 속에는 분명 우리 가정교회의 중요한 정신이 여러 가지 의미로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대형 교회들이 가정교회를 해 주면 고마운 일이지만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굳이 그 많은 유익을 두고 이 좁은 길을 올 이유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가정교회에 참여했던 대형교회들이 지금은 가정교회를 떠났거나 그 교회 형편에 맞는 가정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최 목사님께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본인이 잘못 생각했다고 사과를 한 일이 있습니다. 제게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때 말씀하신 것이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 10명 이야기였습니다. 가정교회는 어떻게 보면 의인 10명이 되는 운동일지도 모릅니다. 2019년 8월 23일자 ‘국제가사원장으로서의 마지막 당부’에 보면, ‘우리는 모든 교회가 가정교회로 전환하기를 기대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선한 영향력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정신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 정신을 붙잡고 가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가 가정교회가 되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정교회는 의인 10명과 같은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제가 진짜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부터입니다. 최 목사님이 그런 것을 깨닫고 공개적으로 돌이킬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께 철저하게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한, 세 축 네 기둥의 가정교회를 시작한 개척자로서의 자기 성찰에서 오는 지혜고 개척자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후의 리더들은 다르다고 봅니다. 여전히 우리 역시도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된다고 봅니다. 힘들고 아프지만, 의도적으로라도 또는 구조적으로라도 그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 첫 사람이 저이어야 한다면 그 십자가를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부족하지만 제게 맡은 바 임무를 겸손히 감당해 보겠습니다. 다시 성경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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