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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휴가 중이지만 ‘다운 공동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상황을 돕는 일’과 ‘준공을 위한 공사는 모두 마무리된 집의 짐 정리’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살면서 한번씩 크게 주변을 정리해야 할 때가 오는데, 이번이 또 한번 크게 버릴 때임을 깨닫습니다. 아마 앞으로 은퇴 전후 제 목회실을 비우는 일과 언제가 될지 몰라도 죽음을 앞두고 기회를 주시면, 천국 가기 전 마지막 정리만 남은 듯 합니다.

 

짐 정리로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아시다시피 우여곡절 끝에 두동 살던 집을 허물고 다시 짓기로 당회가 결정을 했고, 공사를 위해 지난 4월 13일 임시로 장모님이 사셨던 집의 계약 기간이 9월 중순까지라서 그곳으로 거처를 옮겨서 살다가 약 넉달 만인 8월 11일 창고에 보관하던 짐을 옮겨왔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경과도 궁금하실 것이고 집도 궁금하실텐데, 한마디로 이번 건축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무지와 지나친 배려가 사고를 친 경우입니다” “아이들 말로는 가성비 갑입니다.” 무지라 함은 저희들은 건축에서 "비용은 싸면서 방 4개인 것과 교인들이 와서 교제할 넓은 거실"에만 집착을 했지, 도면이 실제 그림으로는 어떻게 나올지는 몰랐습니다. 배려란 감독을 맡은 애처가인 김 장로님께서 원권사님의 “사모님이 원하는대로 해 주라”는 압력에 굴복하여 가능한 원하는 것을 반영하도록 설계자에게 요청을 하다보니 막상 집이 올라가는데 거실 천장이 너무 높아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거실 천장을 막아서 생각지도 않은 특별한 공간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문득 오늘 아침에는 이곳이 마가의 다락방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용이나 보는 눈을 생각하면 결코 계획할 수 없는 공간입니다. 때로는 이렇듯 실수가 선물이 되기도 하네요, 교회당 건축을 해 보았지만 건축은 여전히 어려운 것임을 배웁니다.

 

건물을 본 분들의 평가가 다양합니다. 십자가만 달면 시골 교회 같다고 하기도 하고, 여관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요즘 유행하는 카페같다고 하는 분도 있고, 유럽풍의 집 같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여튼 궁금하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모든 정리를 끝내고 목장별로 초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아내와 아이들과 이렇게 지어진 건물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교회에 유익이 될까 의논을 하면서 일종의 “힐링 센타”의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층의 경우, 높은 거실로 인해서 계획에도 없이 생긴 “가족실(가칭)"로 인해서 한 목장 정도가 와서 1박 2일 힐링의 시간을 보내도 됩니다. 아이들 방이 3개가 나란히 있어서 저희 아이들이 협조를 해 주면 1개 정도의 방은 여자 아이들이 사용하고 남자들은 가족실에서 자면 특별히 저희들이 방해받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도 그렇게 해 주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아이들이 "우리는 늘 그랬듯이, 집을 짓고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했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른들은 목사집에서 자는 것이 오히려 불편할 수 있으니 파워틴과 청년 목장이 원하면 그렇게 활용했으면 합니다. 저도 은퇴 후, 외롭지 않는 노인이 되려면 지금부터 젊은 친구들을 사귀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다운공동체 미래를 위해서 그들에게 조금은 저의 이야기와 교회 이야기, 인생 이야기를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들려주는 시간을 조금은 갖고자 함입니다. 또한 아이들이 '목사님 댁'에서 자본 추억도 만들어 주고 싶고, 좋은 가정과 집에 대한 꿈도 꾸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어린이부서는 기대감을 주기 위해 부모님들이 목장에 올 때 오는 것으로만 하고, 파워틴이 될 때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다운 가족 여러분!

다시 한번 하나님과 당회 그리고 다운 가족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18년 사역이 기쁨도 있었지만 힘든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결론은 칼럼 제목처럼 ”저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 말은 수술 후 회사를 쉬는 기간에 감독을 맡아준 김흥환 장로님께서 우크라이나 전쟁, 당신의 건강 상태, 저희들이 묵을 곳 등 상황을 보면 도저히 건축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 것을 보시고 마지막 소회를 나누면서 당회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목사님이 복이 많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시 한번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 공식적인 칼럼은 여기까지입니다. 사진 이후의 글은 읽으셔도 되고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새벽 침샘 염증으로 인한 고통으로 일찍 일어나서 언젠가 한번은 말씀드리고 싶었던 다운공동체 교회 담임목사 사택과 저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드디어 쓰게 되었습니다. 목회를 해 보면 꼭 소수의 몇 분들이 교회를 옮겨도 거의 같은 몇 가지 문제로 시험드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담임목사 사택 문제’와 ‘사례’, '차량'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랬습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저는 부임하면서 교회가 제공하는 사택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따라서 이번 일에도 정말 시험드는 분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래 글을 제공합니다. 혹 궁금하신 분들이나 살폿한 의심이 드는 분들은 정말 꼭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보통은 그런다고 달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만 소통은 제 몫이라서 나눕니다. 그런 분이 아니더라도 읽어보면 재미도 있을 것입니다. 더 궁금하신 분, 잠이 안오시는 분들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진 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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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의 집 이야기!

오늘은 오랜만에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고 저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지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 가정의 집과 관련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얼마 있지 않아 아파트를 구입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내의 성실한 직장생활과 검소한 성격 덕분이었습니다. 아내는 현대에서 14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의 사랑과 도움도 있었지만 제가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내의 희생 덕분입니다. 표현을 거의 하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 속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어서 이 자리를 빌어 아내 자랑을 좀 했습니다.

 

또한 제 개인적인 능력도 조금은 일조를 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목회자를 꿈꾸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목회에 실패한 아버지로 인해서 목회자는 기피 직업 1호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저를 문과가 아닌 이과로 진로를 선택하도록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결혼을 했지만, 가장으로서 집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은 여느 모든 가장들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집을 떠난 후 아르바이트를 놓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생때부터 신문배달을 시작으로 거의 용돈 정도는 제가 해결했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는 과외가 금지되어 있었는데, 시절이 수상해서인지 대학생만은 과외를 허용해 주었습니다. 가르치는 달란트를 하나님께서 주셨는지 과외가 주업이 되었습니다. 많이 가르칠 때는 12탕(12 그룹)을 했습니다. 삶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휴학을 6번이나 하게 되었는데 졸업은 늦어 졌지만 과외는 더 오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경제적인 독립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 이미 국산이긴 했지만 스포츠카를 타고 다녔습니다. 졸업반일 때는 입주 과외를 하는 집에서 그랜저를 제공해 주기도 해서 겁 없이 타고 다녔습니다. 신대원을 다닐 때는 교수님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회사의 신형 차를 제가 제일 먼저 구입해서 몰고 다니는 바람에 수업시간에 이야기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형차가 궁금하실 것 같아 밝힙니다 ^^; 아반떼!! ㅎㅎ, 이러한 다양한 경험 덕분에 제게 차는 일찍부터 꿈의 대상이 아닌 이동수단의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런 제가 차문제로 구설수에 오를줄은 몰랐습니다. ^^; 그 또한 저를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이제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물질적인 부분에서 목회자에 대한 의심(?)이나 불평이 나올 때는 슬프기도 했습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영성과 인품은 부족할지 몰라도 그나마 장점이라면 물질에 대한 투명성인데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싶어 자괴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다고 무슨 큰 부자는 아니지만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가 어릴 때부터 가진 지나친 독립심이 가져다 준 자신감이 어떤 분들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았나 싶어 회개합니다. 제가 안식년을 가질 때 은사 계발 수업 중에 보니까 직관의 은사와 더불어 문제 해결을 직접해 버리는 성향이 있음을 교수님이 말씀해 주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성장배경과도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이것도 위기 상황에서는 필요하지만 이제는 내려 놓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는 95년도에 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했습니다. 목사가 되려고 간 것은 아니고 기독교학교 설립에 목사라는 타이틀이 필요하겠다는 윤충걸 원로장로님의 제안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무엇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갚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뭘까 생각해보니, 제가 잘하는 가르치는 일로 하나님께 조금이나마 영광을 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학교 운동에 헌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목사님이거나 교인들이었습니다. 20대 청년이 그들을 만나서 꿈을 이야기하고 후원을 요청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 타이틀이 필요하겠다는 반 우스개 소리의 권면을 받아들여 신학교를 갔습니다. 물론 기독교 학교를 세워야 하니까 신학적인 정립도 필요했습니다. 아울러 신학교 입학과 동시에 저는 돈을 받고 하는 과외를 내려놓고 동네 어려운 아이들이나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신혼집에서 무료공부방을 시작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헌신의 시간이었습니다. 소수의 제자들만 현재 우리 공동체에 남아있기 때문에, 나머지 100여명이 넘는 아이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가끔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서 수입은 제로가 되었지만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생활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당시 아내도 늦은 공부를 시작해서 집을 팔까 생각도 했지만, 버텨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유학을 가게 되면서 집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을 다 써버리고 만약에 한국에 돌아오면 어떻게 하나 싶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 교회로 돌아올 사람도 아니기에 교회가 사택을 제공해 줄리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사업을 하는 누님의 도움으로 누님이 저희 돈을 차용하고 이자를 보내주어 그 이자와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원금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기독교학교가 아닌 다운공동체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이라고 봅니다. 지금의 다운공동체는 많은 목회자들이 담임으로 오고 싶어하는 교회가 되었지만 적어도 당시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항상 우리는 무엇이든 왜 그랬을까를 당시의 기준으로 생각해야겠습니다. 부임할 때 교회 상황은 많이 어려웠습니다. 교회는 보통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 노회에 담임목사 예우에 대한 약속을 하고 허락을 받은 후 청빙을 합니다. 그러나 당시 교회 형편상 세 가지 약속이 모두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사례도 약속한 대로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고, 차량 제공도 무리였고, 교회 사택도 당장 2대 목사님의 노고와 은퇴 후 묵을 집이 필요했기에 사시던 사택을 드리기로 했기에 저희들이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교인 숫자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교인들은 참으로 그 희생을 감당했고 최선을 다해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이후에 오신 분들이 그것을 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감당해야 할 몫을 감당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빚도 갚고 다음세대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가족을 캐나다에 남겨두고 먼저 들어와서 전셋집에 살고 있었는데, 참고로 이때까지 저희들이 이사한 횟수는 17번이었습니다. 대부분이 사역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형편상 제가 사택을 달라고 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저와 다운공동체교회의 특별한 관계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특권이 되어서도, 굳이 부정되지도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즉 저는 이 교회 청년부도 있었고, 전도사를 했던 어쩌면 다운공동체의 교인 출신 담임목사였기에 가능했습니다. 분명 그것이 희생이라는 장점으로 작용했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봅니다. 교회가 다운교회 출신 목회자이기 때문에 할 말 못하고 심지어 손해 본 것도 분명 있을 겁니다만, 그럼에도 그런 특별한(?)관계였기 때문에 제가 담임목사로서 많은 것을 내려 놓으면서 목사의 마음보다 한 사람의 다운 교인의 마음으로 오직 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헌신했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부분만 이해하셔도 많은 것이 이해가 될텐데 참으로 그동안의 이런 저런 일들이 안타깝게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물론 누군가 설명을 해 주었어야 했는데 정신없이 오다보니 놓친 부분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는 더 이상은 저와 같은 담임목사는 없을 것이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오는 담임목사를 비롯 부교역자들에게는 최선을 다해 목회할 수 있도록 예우하는 교회가 되고 교역자들은 정말 선한목자로서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당시 저는 제가 먼저 귀국해서 살던 전셋집에서 계속 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가족이 모두 귀국을 하니 집이 생각보다 5식구가 살기에는 좁았습니다. 또한 교인들을 초대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 때, 지금은 천국 가신 장모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세를 안고 융자를 받아 다운동 주택을 구입하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도 장모님은 이해를 못하셨습니다, 기다리다보면 교회가 사택을 제공할텐데 굳이 집을 사려고 하는지를요,

 

그 이유는 저의 경험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러지 말걸 하는 후회도 합니다만, 저는 한 교회를 맡은 담임목사가 되었지만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고 공동체의 다수가 원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거나 목회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목회자든 누구든 자기의 사역이나 일을 쉽게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는 이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위의 목사님들을 보니까 교회를 떠날 때 제일 슬픈 것이 어제까지 그렇게 착한 교인들이 사택을 언제까지 비우라고 통보를 하시더군요, 당장 집을 구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목사들은 그야말로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대책도 없는데 나가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같은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나 싶었습니다. 최근에도 우리 교회 출신 부목사님이 직접 겪은 일입니다. 담임으로 취임식까지 했지만 이런 저런 일로 사임을 하자, 문 앞에 집을 비우라는 날짜를 적어놓고 가는 중직자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정말 소수지요, 그러나 설치는 소수를 다수는 침묵하기에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하면 목회자들이 현역에 있을 때 자택을 갖기를 권합니다. 최근에도 어떤 목사님이 담임으로 가면서 교회에서 사택을 주는데, 본인이 살던 작은 아파트 팔아서 헌금을 하면 어떻겠냐고 묻길래, 정말 본인 믿음이 그러면 하겠지만,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있었던 교회는 부목사들에게 사택을 제공하지 않는 교회여서 한 교회에 부목사로만 20년 가까이 있다보니 사모님이 일을 해서 집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속이는 느낌이 든다고 하길래, 교회에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해 주었습니다. 제가 말한대로 했고 지금은 장성한 자녀들이 시내에 있는 그 집에서 머물며 직장생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 또한 개인과 교회의 형편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도 사택이 없는 교역자는 제공을 하고, 형편이 되면 저는 자택을 구입하는 것으로 권면하고 교회가 할 수 있는 후원을 합니다. 현재 양순안 목사도 자택을 구입해서 살고 있고, 교회가 사택을 제공하지 않는 대신에 구입할 때 비용의 일부를 차용해주었습니다. 사임할 때 교회에 반환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택유지비라는 이름으로 매달 조금은 지원을 합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계속 교회 형편에 따라 현실화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지섭 전도사도 파트지만, 우리교회에 부임할 때 제가 여러 형편을 보니 부모님의 도움과 본인이 가진 조건들로 인해서 대출을 받고 하면 집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여서 당시는 집값이 오르기 전이라서 집을 구입하도록 권면했는데 잘 한 것 같습니다. 우리 부교역자중 파트지만 제일 좋은 집에 삽니다, 저는 캠퍼스 사역자로 수고한 신 전도사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라고 봅니다, 신전도사는 언제 쫓겨나도(?) 여섯 식구가 당장 이사 부담없는 '신의 아들'입니다. 졸업을 하고 풀타임 사역자가 되면 자택이지만, 교회가 사택을 제공하지 않는 대신에 합당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몰론 이 모든 것들도 교회가 형편이 될 때말입니다.

 

여하튼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저는 지금까지 자택에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형편이 안되어서 그 다음에 풀타임 부교역가 오다보니 먼저 집이 없는 그들부터 사택을 제공 해야 해서 우선순위에 밀렸습니다. 그 중간에 당회는 늘 이 부분을 미안해 했고, 그러던 중에 제가 지금 사는 두동으로 들어갈 때, 윤장로님께서 그 집은 개인 재산이니 그대로 두고 설교준비 등을 할 때 이용하시고, 사택을 마련하자고 제안을 했지만, 멀쩡한 집을 별장처럼 두고 따로 사택에 들어가는 것은 여러 가지로 덕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사양했습니다. 대신에 2012년 안식년을 다녀오고 나서 그 다음 해부터인가 융자부분에 대한 이자를 교회가 내 주었습니다. 사실 당시 저희 집값은 시내 아파트 값보다 쌋지만, 전원이 주는 환경은 어느 목회자보다 행복함을 누렸습니다. 무엇보다 돈도 돈이지만 목회자가 마당 넓은 집에 산다고 시험에 들 수도 있을텐데, 여러분들이 좋게 봐 주셔서 잘 지냈습니다. 우스개 소리지만 “목사님 몇 평이세요?” “그것이 교회 소유입니까? 목사님 겁니까? ”하는 질문을 받아 본 것 외에는 모두들 널리 이해해 주었고 그 또한 다 지나간 일입니다. 그야말로 저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제 어떻게 하다가 집을 수리하지 않고 짓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예배당 건축을 마치고 윤장로님께서 파송을 나가시면서 당부한 몇 가지 중에 “담임목사 사택 문제를 이제는 해결 해주길 바란다”는 말씀이 들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청빙할 때 지키지 못한 약속이라 마음에 걸린다면서 미안한 마음과 함께 후배 장로님들에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담임목사 사택 문제에 대해서 몇 차례 당회가 열렸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저와 교회의 ‘특별한 관계’로 인해서 처음에는 두동 집을 수리해서 사용하는 것이 덕이 될 듯 하여 그렇게 진행했습니다. 그 집은 20년 된 목조집이라서 습기로 인해서 썩고 낡아 있었습니다. 특히 방이 2개 밖에 없는 것을 다락을 방으로 만들어서 딸 아이들이 쓰고 있었는데, 아들은 방이 없어서 중고 카라반에서 몇 년째 생활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을 하나 넣고 수리를 하고 융자금을 교회가 갚아 주는 것으로 담임목사 사택 문제를 마무리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당장 법적으로 이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다락이 2층에 들어가서 내진 설계부터 다시 해야했고 무엇보다 수리업자들이 수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았다고 수리를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별채만 하나 짓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언젠가는 안채를 새로 지을수 밖에 없을텐데 하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당연히 팔고 교회가 구영리에 사택을 구입하는 것도 고려했습니다만,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집값 상승으로 구입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고, 전세금만 해도 적지 않은 금액이라 교회 형편상 부담이 되었고 저 역시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당회는 은퇴 후를 생각해서 저희가 땅을 제공해 주면, 있는 땅에 새로 짓는 것으로 최종 결정을 했습니다. 다시 한번 저와 다운공동체의 특수한 관계가 작동했다고 봅니다. 서로 신뢰 가운데서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다시 한번 당회원들의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당회가 성숙되이 하나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문제는 비용인데, 교회가 너무 부담을 지면 안되니, 교회가 일부 제공하고, 저희도 일부 융자를 내기로 했습니다. 칼럼은 교회 외부인도 읽기에 자세한 비용 부분은 여기에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적어도 32평 구영리 전세값(3억5천-4억기준) 보다는 적게 들었고 그 부분을 교회와 저희가 나누어서 부담을 했습니다. 즉, 저희가 땅을 제공했고, 교회와 저희가 건축비를 나누어 부담을 했습니다. 물론 건축비에서는 교회부담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로써 건축비만 보면, 구영리 32평 전세비용보다는 적은 비용으로 사택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서 갑자기 자재비가 올라서 많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김장로님께서 허리 수술 후 회사를 쉬는 기간이라서 아픈 몸이지만 직접 감독하여 소위 “직영”을 해 주시기로 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실 김장로님께서 해 주시지 않았다면 도저히 저희가 이 비용을 가지고는 감당이 안되었을 것입니다. 저도 예배당 건축을 지켜보아서 알지만, 김장로님 덕분에 최소한 시공사에게 돌아갈 부분과 기타 김장로님의 경험과 워낙 치밀한 계획 덕분에 저 같은 아마추어가 볼 때도 최소한 5천만 원 이상 최대 1억 이하 정도에서 절감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이번 일을 보면서 교회가 건강하면 참으로 김장로님을 비롯한 어떤 분들의 경험은 젊은이들을 위해서 귀하게 쓰일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신뢰가 없는 관계에서는 오히려 시비거리가 되는 것을 경험했기에 지금은 마음에만 담아둡니다. 사실 담임목사의 사택 일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당회의 책임이라는 공감아래 당회원들이 김장로님의 수고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다운 가족 여러분! 이로써 지난 몇 년 예배당도 짓고, 담임목사 사택문제도 일단락했습니다. 이제 다시 사람을 구원하고 세우는데 힘을 모읍시다. 불신자들을 전도하고 제자들을 세우고, 리더들은 더 리더다워지고 무엇보다 우리의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에 함께 힘을 모아주시길 부탁합니다. 저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 복을 다시 목회를 통해 흘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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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칼럼 “33절의 주인공이 되자” (1)   2005.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