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무심한 아들놈
무심한 아들놈
(이 글은 고신대학교 박영돈교수님이 쓰신 글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24년 전 내가 지금 잠시 와 있는 뉴저지에서 돌아가셨다. 오늘도 나는 어머니가 우리 가족과 함께 지냈던 집을 지나쳤다. 73세의 연세에 아주 건강하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감기증세와 열이 떨어지지 않아 입원했다가 끝내 병원 문을 걸어 나오지 못하셨다. 아프시기 전에 누님들과 형님네가 사는 LA에 다녀오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다른 형제들이 사는 LA에서 9년 간 이민생활을 하다가 나의 박사학위과정을 위해 동부로 함께 이주하였다. LA에서도 부유한 다른 자녀들 집을 마다하시고 신학 공부하느라 가장 가난하고 누추한 우리 집에 계시면서 직장 생활하는 아내를 대신해서 우리 아이들을 키워주시고 집안 살림을 해주셨다. 그 뿐 아니라 미국정부가 노인들에게 매달 주는 웰페어까지 가난한 신학생 아들에게 몽땅 헌납하셨다.
어머니는 30대에 과부가 되고 50이 넘어 뒤늦게 예수님을 믿으면서 교회를 눈물겹도록 헌신적으로 섬기셨다. 교회를 생전 처음으로 나간 주일 다음날부터 새벽기도회를 빠짐없이 나가셨다고 한다. 매일 새벽 불쌍한 과부가 드리는 애절한 기도를 하나님은 아주 이상하게 응답하셨다. 어머니가 교회 가자는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버럭 화를 내며 교회는 위선자들이나 죽을 때가 가까운 노인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역정을 내던 망나니 같은 막내아들이 꼬꾸라져 예수를 믿게 되고 급기야는 내가 죽기보다 싫어하던 목사까지 된다고 하니 어머니가 얼마나 좋으셨을까. 덩실덩실 춤을 추실 정도였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막내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셨는데 주의 일을 한다고 하니 더욱 헌신적이셨다.
칠순이 되셔도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나면 몸이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하시며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하셨다. 그 덕분에 내가 아쉬움 없이 평안히 공부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하루라도 없으면 그 불편함은 말할 수 없었다. 생전 그러시지 않았는데 아프시기 얼마 전에는 형님과 누님들 가족을 보러 LA에 다녀오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내 공부에 지장이 생기고 여러 가지 불편함을 감수하기 싫어 나중에 가시라고 만류했다. 돌아보면 내가 참으로 이기적이고 무심한 아들놈이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나의 유익만을 위해 어머니를 부려먹고 어머니에게 해드린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교수로 일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셨다. 그토록 자신을 희생해서 헌신한 결과와 그 덕을 전혀 보지 못하신 것이다.
그러니 나는 가장 어머니날 설교를 할 자격이 없는 목사이다. 어머니날이면 특별히 모친을 이미 떠나보낸 자식들은 후회와 자책으로 가슴이 저밀 것이다. 아직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평생 남게 될 이 회한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 기회가 있어 참 다행이다. 어버이 살아 계실 때 잘 하라는 고어가 새롭게 와 닿은 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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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줄 알았으면 진작 부모살아 생전에 효도할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