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자랑을 뛰어 넘는 부활절 정신
고난주간을 보내며 이 글을 씁니다. 화요일 우리 교회의 목회방향에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기독신문 기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기독신문에 글을 하나 써 주십사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다’면서 본인이 더 아쉬워했습니다. 제가 좀 알려지길(?) 원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글을 쓸 기회는 놓쳤지만, 우리교회가 부활절을 전후해서 갖는 궁거랑 축제와 군부대와의 연합 부활절 예배를 기사화 하고 싶으니 사진과 행사 취지를 정리해서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정중하게 부탁을 해 왔습니다. 일부러 언론플레이를 한 것도 아니고 해서 교역자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협조해 줄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분명 부활절에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교회를 떠나 오히려 누군가를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 결코 작은 일 아닙니다. 주님이 무덤 속에 계신 금요일과 토요일 그리고 주일 우리 다운가족들의 멋진 순종과 섬김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제 마음 밑바닥에서 교회 사역을 자랑하고픈 조금은 불편한 동기가 있음이 보였습니다. ^^;
고난주간이 절반 지나갑니다.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를 하면서 앞의 두 불편한 마음의 실체가 무엇일까 고민해 봅니다.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일은 아니지만 본질은 아닐 것이라는 마음속으로부터 음성을 듣습니다. 가끔 담임목사라는 이유만으로 공동체를 위한 어떤 직관을 주시는 것을 느낍니다. 이 부활절을 보내면서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께서 지금 다운공동체와 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기까지 써 놓고 며칠 째 멈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처한 형편이나 믿음의 정도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가 '왜 예수를 믿는냐?'고 했을 때, 한 가지 이유라도 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종의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으로 산다는 것은 약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종은 결코 강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종은 자기 고집을 피울 수가 없습니다. 종의 삶은 ‘자기 부인’의 삶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종이 자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자기가 판단을 하고 자기 생각에 옳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믿는 다면 그것은 종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종의 삶은 ‘내려놓는 삶’입니다. 내가 누릴 수 있다고 다 누리는 교만도, 누리고 싶은 것을 위해 무리하는 욕망도 내려 놓는 삶입니다. 할수 있는 한 조금 더 단순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종의 삶이 실제적으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제가 생각할 때, 일단 변명하지 않는 삶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차라리 침묵은 지킬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삶입니다. 양심이나 주변의 소리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 자기 같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삶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곧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삶입니다. 실상은 조바심이나 욕심인데 주님의 뜻이라고 위장하지 않는 삶입니다. 남을 이용하지 않는 삶입니다. 비난하지 않는 삶입니다. 표절하지 않는 삶입니다. 립싱크나 립 서비스 하지 않는 삶입니다. 맡은 일에 대해 책임을 감당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의 삶이 불편할 것 같지요? 아닙니다. 진짜 종이 되기로 마음먹으면 종이 되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은 결정할 일도 책임질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주인 양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실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책임지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니까요! 저도 아직까지 이렇게 산다고 큰 소리 칠순 없지만, 그래도 이런 삶을 함께 도전해 가는 제자가 더 많이 나오기를 소망하며!
주인된 마음을 내려놓고 종된 마음으로 살아 보려고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