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1월15일 칼럼 - “황우석교수" 기자회견에서 본 리더십
세상은 싫든 좋든 언제나 이슈가 될 만한 이야기 거리를 제공합니다. 최근 이슈는 분명 “황우석 사건” 일 것입니다. 한국의 영웅으로 그리고 현대 한국이 낳은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로 순식간에 떠오르던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대한 진실 게임은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감자로 이슈화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발표가 있었고 어제 12일에는 거기에 대한 황우석 교수의 “해명성”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명보다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더 많이 드러난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두고 사람들은 각자의 기호에 따라 흥분도 하고 분석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히팅크가 월드컵에서 한국팀을 4강에 진입시켰을 때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히딩크의 경우는 과정과 결과에서 성공한 케이스였고 황우석 교수의 경우는 적어도 과정에서는 실패한 경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성공한 것에서만 배우려하거나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실패에서도 성공에서만큼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인터넷 신문을 보니 젊은 과학자들은 일관되게 과학자로서의 과학적 사실과 윤리 문제에 관심이 많은 듯 합니다. 검찰은 이제 본격적으로 진실을 가려보려는 것 같습니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분들은 논문조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맞춤형 줄기세포라는 꿈을 못 버리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정치인들은 기자회견에서 언급된 ‘판교프로젝트’와 관련된 경기도의 고위인사가 누구인지 궁금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관심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처음 이 사건이 터졌을 때 저의 관심은 목회자로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없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은 한 순간도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인도되지 않으면 반드시 무엇인가에 자신의 영혼을 팔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마치 괴테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파우스트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어제 기자회견을 보면서는 저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리더십입니다. 황교수는 연구원들의 장래를 위해서 그 연구원들을 데리고 나와서 이들은 잘못이 없으니 비난의 화살은 나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동역자들과 일하는 저로서는 충분히 공감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그의 진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 자신의 아픈 가정사를 이야기하면서 연구에 미쳤던 자신과 그러한 자신 때문에 희생당한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모습 역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물론 이런 행동들이 리더로서 잘한 일인지는 고민이 됩니다. 그것도 리더에게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선택의 문제 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논쟁의 여지는 있겠으나 이것이 리더로서의 본질적인 자질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리더의 본질적인 자질에 대해 고민하게 해 준 것은 기자회견 마지막 부분에 나온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황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겐 줄기세포를 배양해본 경험이 없었고, 배양과정에 있는 중간단계(줄기세포)의 진실성을 진단할 만큼 안목이 없었다.”
저는 이 말 한마디에서 많은 문제의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저만의 진단이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이 말에 대한 진실성 여부도 논쟁중입니다. 워낙 이 분이 변명(?)을 많이 한 탓이겠지요. 그런데 진실이라고 전제한다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이 진실이라면 황교수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가 잘 모르는 연구 분야의 최고리더로 앉아 있었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차병원 세포유전자치료연구소 백광현 교수에 의하면 “동물 난자와 사람 난자를 배양할 땐 조건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원래 황교수는 수의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이 말이 수의학이 의학보다 낮은 학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모든 학문은 그 자체로서 자기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황박사의 연구관심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옮겨진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든지 공부하고 자격을 갖추면 됩니다. 일부 언론에서처럼 일부 의사들이 자존심 때문에 황박사를 폄하하려고 했다는 시도가 사실이라면 그 의사들이 사람 값을 못하는 것이겠지요. 황박사 부근에는 황박사의 연구에 협조한 의사들도 많았습니다.
문제는 황박사의 연구가 동물에서 인간영역으로 넘어갈 때 황박사의 리더로서의 준비였습니다. 사실 황박사의 연구가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동물을 이용한 실험들이 이제 인간에게 적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황박사님은 많은 부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분명 동물연구와 인간연구는 연계선상에 있지만 전혀 다른 부분입니다. 그것은 가정과 교회가 유사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아주 다르고 회사와 교회가 유사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른 것의 차이겠지요.
황교수가 리더로서 그 큰 연구실의 세세한 것까지는 알지 못하고 알 필요는 없다고 해도 이제 인간난자 연구로 넘어갈 때 가장 본질적인 부분인 인간줄기세포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준비 했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연구기금을 조성하고 정치인을 만나고 심지어 강원래를 비롯한 불치병을 가진 장애인이나 환자를 만나는 것보다 가장 우선적인 일이어야 했습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자신의 역할을 거기까지로만 하고 지금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어야 옳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물론 황박사는 줄기세포 배양에 대한 기술을 가졌던 연구원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배양에 대한 전적인 위임을 한 것을 자신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라고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신뢰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임이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있고 알지만 맡기는 것이지 모르는 것을 맡기면서 위임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탁이라고 하거나 시쳇말로 “떠 넘겨”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도 교회 생활도 마찬가집니다. 한때는 내가 이 분야에서 잘 준비가 되었고 잘 쓰였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한계가 온다는 것. 그 한계를 느낄 때 우리가 취할 방법은 더 준비하든지 그럴 자신이 없으면 더 준비가 잘 된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법. 이것을 읽고 실천하는 것이 지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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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1. 13일 목양실에서
그 이야기들을 두고 사람들은 각자의 기호에 따라 흥분도 하고 분석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히팅크가 월드컵에서 한국팀을 4강에 진입시켰을 때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히딩크의 경우는 과정과 결과에서 성공한 케이스였고 황우석 교수의 경우는 적어도 과정에서는 실패한 경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성공한 것에서만 배우려하거나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실패에서도 성공에서만큼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인터넷 신문을 보니 젊은 과학자들은 일관되게 과학자로서의 과학적 사실과 윤리 문제에 관심이 많은 듯 합니다. 검찰은 이제 본격적으로 진실을 가려보려는 것 같습니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분들은 논문조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맞춤형 줄기세포라는 꿈을 못 버리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정치인들은 기자회견에서 언급된 ‘판교프로젝트’와 관련된 경기도의 고위인사가 누구인지 궁금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관심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처음 이 사건이 터졌을 때 저의 관심은 목회자로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없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은 한 순간도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인도되지 않으면 반드시 무엇인가에 자신의 영혼을 팔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마치 괴테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파우스트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어제 기자회견을 보면서는 저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리더십입니다. 황교수는 연구원들의 장래를 위해서 그 연구원들을 데리고 나와서 이들은 잘못이 없으니 비난의 화살은 나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동역자들과 일하는 저로서는 충분히 공감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그의 진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 자신의 아픈 가정사를 이야기하면서 연구에 미쳤던 자신과 그러한 자신 때문에 희생당한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모습 역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물론 이런 행동들이 리더로서 잘한 일인지는 고민이 됩니다. 그것도 리더에게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선택의 문제 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논쟁의 여지는 있겠으나 이것이 리더로서의 본질적인 자질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리더의 본질적인 자질에 대해 고민하게 해 준 것은 기자회견 마지막 부분에 나온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황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겐 줄기세포를 배양해본 경험이 없었고, 배양과정에 있는 중간단계(줄기세포)의 진실성을 진단할 만큼 안목이 없었다.”
저는 이 말 한마디에서 많은 문제의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저만의 진단이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이 말에 대한 진실성 여부도 논쟁중입니다. 워낙 이 분이 변명(?)을 많이 한 탓이겠지요. 그런데 진실이라고 전제한다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이 진실이라면 황교수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가 잘 모르는 연구 분야의 최고리더로 앉아 있었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차병원 세포유전자치료연구소 백광현 교수에 의하면 “동물 난자와 사람 난자를 배양할 땐 조건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원래 황교수는 수의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이 말이 수의학이 의학보다 낮은 학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모든 학문은 그 자체로서 자기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황박사의 연구관심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옮겨진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든지 공부하고 자격을 갖추면 됩니다. 일부 언론에서처럼 일부 의사들이 자존심 때문에 황박사를 폄하하려고 했다는 시도가 사실이라면 그 의사들이 사람 값을 못하는 것이겠지요. 황박사 부근에는 황박사의 연구에 협조한 의사들도 많았습니다.
문제는 황박사의 연구가 동물에서 인간영역으로 넘어갈 때 황박사의 리더로서의 준비였습니다. 사실 황박사의 연구가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동물을 이용한 실험들이 이제 인간에게 적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황박사님은 많은 부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분명 동물연구와 인간연구는 연계선상에 있지만 전혀 다른 부분입니다. 그것은 가정과 교회가 유사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아주 다르고 회사와 교회가 유사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른 것의 차이겠지요.
황교수가 리더로서 그 큰 연구실의 세세한 것까지는 알지 못하고 알 필요는 없다고 해도 이제 인간난자 연구로 넘어갈 때 가장 본질적인 부분인 인간줄기세포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준비 했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연구기금을 조성하고 정치인을 만나고 심지어 강원래를 비롯한 불치병을 가진 장애인이나 환자를 만나는 것보다 가장 우선적인 일이어야 했습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자신의 역할을 거기까지로만 하고 지금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어야 옳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물론 황박사는 줄기세포 배양에 대한 기술을 가졌던 연구원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배양에 대한 전적인 위임을 한 것을 자신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라고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신뢰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임이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있고 알지만 맡기는 것이지 모르는 것을 맡기면서 위임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탁이라고 하거나 시쳇말로 “떠 넘겨”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도 교회 생활도 마찬가집니다. 한때는 내가 이 분야에서 잘 준비가 되었고 잘 쓰였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한계가 온다는 것. 그 한계를 느낄 때 우리가 취할 방법은 더 준비하든지 그럴 자신이 없으면 더 준비가 잘 된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법. 이것을 읽고 실천하는 것이 지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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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1. 13일 목양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