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목회칼럼

장보고과 이순신


저희 집은 곧 TV 케이블을 끊을 예정으로 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아이들이 비디오도 보고 인터넷도 하는데 거기다 TV드라마까지 봐서는 안되겠다 싶어서이고 두 번째는 제가 본래 시골출신이라 드라마를 좋아하는데 이렇게 바쁜 스케줄에 텔레비전까지 보다가는 가족들과 전혀 대화할 시간이 없을 듯 해서 입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께서 겨울에 와 계실 때 효도차원(?)에서 연결한 케이블을 아직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인은 그 즈음 시작한 두 드라마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해신과 이순신입니다. 사실 저에게는 비디오로 간직할 정도로 좋아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것은 80년대 암울했던 시대상을 다루었던 “모래시계”라는 드라마 입니다. 얼마나 감동했던지 유학 갈 때 비디오로 된 것을 사서 챙겨가 명절 같은 때에 아내와 1박 2일씩 연속해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만난 드라마가 바다를 통해 무역을 주도하던 신라시대의 인물 장보고를 다룬 해신과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시대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공통적인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1. 차이와 공통점
먼저, 두 사람은 우리 역사에서 바다를 무대로 활동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장보고는 서남해의 청해진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제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인물인 반면,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에서 해양 침략세력인 왜군과 해전을 벌여 23전 23승의 신화를 일구어낸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그 바다가 처해있던 시대상황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장보고가 해양진출의 상징이라면 이순신은 해양 수호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보고가 활동한 9세기는 해양의 시대였고 이순신이 활동한 16세기는 해금의 시대였습니다. ‘해양의 시대’란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열린 공간으로 인식하고 바다를 통한 자유로운 인적․물적 교류를 전개해간 시대를 의미하는 반면, ‘해금의 시대’란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그러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꺼리게 되고, 그리하여 바다를 장애물로 여기게 된 시대를 의미합니다.

장보고는 ‘해양의 시대’에 바다 활용을 극대화하여 일약 동아시아 최고의 해상무역가로 성공을 거두었고, 이순신은 ‘해금의 시대’라는 악조건을 무릅쓰고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해양 침략세력과 海戰을 벌여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일구어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역사에서 장보고와 이순신은 아예 등장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여전히 시대와 수식어만 바뀐 훌륭한 조상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요? 즉, 9세기에는 “해상 왕 이순신을”, 16세기는 “불멸의 영웅 장보고”를 말입니다. 저는 왠지 후자일 것 같습니다. 환경이전에 사람이라고 믿으니까요.

2. 원칙, 본질, 상식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두 사람을 비교해보면 무엇보다 그들을 그들되게 하는 것은 그 승리나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시대정신을 따르기보다는 시대를 뛰어 넘는 원칙과 본질 그리고 상식에 충실합니다.

<삼국사기>는 장보고를 모반을 획책한 반역자 라고 했고, <삼국유사>는 그를 반란을 획책한 미천한 해도인(海島人. 섬놈) 이라며 노골적으로 경멸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작자인 소설가 최인호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역사의 행간을 봅니다.

최인호씨는 한 심포지엄에서 장보고에 대한 두 가지 오해를 풀고서야 장보고를 주제로 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고 고백합니다. 두 가지 오해는 장보고가 반역자라는 것과 그가 과도한 욕망을 지닌 인간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었는데, 최인호의 이런 오해를 풀어준 것이 장보고 유적을 따라 돌아다닌 7개 나라, 30만km에 이르는 답사여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여정을 마치고 장보고는 청해진인도 아니고 신라인도 아닌 1200여년 전의 위대한 세계시민 이라고 단언 하고 있습니다.

사실,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노예라는 밑바닥에서부터 신라정권의 실세로까지 소위 성공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혼탁한 정치 싸움에 휘말리기 싫다며 나는 충심을 다해 청해진을 건설하고 신라의 재정을 번성시켜 나아가겠다 며 신념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청해진을 건설함에 있어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 있는 사람이 있으면 중책을 맡기겠다 며 신분계급철폐 에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는 염장을 용서하고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원칙과 본질 그리고 상식에 충실하는 모습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또 어떻습니까? 동시대의 원균처럼 폭발적이고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무인의 자랑이던 시절에 이순신은 상사인 이일 장군으로부터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치사하게도(?) 계급장을 떼이고 군졸로 다시 시작하는 구차한 삶, 무인으로서는 치욕의 길을 택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아름답게 생각하는 백의종군이란 말이 얼마나 굴욕적인 선택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장보고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이순신은 상민은 물론 노예들과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하여 계속 토론을 합니다. 거북선도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수백 년을 뛰어 넘는 두 사람이 얼마나 닮았는지 모릅니다. 고집스럽게 원칙을 준수하고 본질을 붙잡으며 상식위에서 삶과 전쟁을 다룹니다. 고뇌가 깊으면 깊을수록 원수가 설치면 설칠수록 전쟁이 코앞에 다가올수록 더 그렇게 합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3. 원칙주의자는 영웅인가? & 실패자인가?
흔히 이 두 사람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왕 또는 영웅입니다. 왕이나 영웅은 성공한 사람들에게 붙는 수식어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 듯이 두 사람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장보고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용서한 염장에 의해 죽고, 이순신은 적의 총에 맞아 죽습니다. 역사가들은 설령 이순신이 살았더라도 당시 왕이었던 선조와의 관계나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결코 영웅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두 사람은 사실 원칙을 지키다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는 살아남은 자들이 자신들의 존재의 가벼움을 감추려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장보고나 이순신과 같이 일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출세하기 힘듭니다. 상식과 합리보다는 자기 상사의 기분을 헤아리고 그에 맞는 말과 행위를 해주는데 온갖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인정받고 출세의 사다리를 쉽게 타고 오르는 법입니다. 일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원칙에 충실하여 일하려는 사람보다는 일단 남의 이목을 끌고 보자는 생각으로 트릭을 쓰고 이벤트를 만드는 사람이나 단체가 대부분 성공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야말로 영웅의 이야기는 드라마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립니다. 원칙을 좋아하면서도 본질에 집중하고 건강한 상식을 기대하면서도 막상 그것을 위한 댓가는 치르려 하지 않는 이중성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건강한 교회에 다니길 소망합니다. 그들의 목회자가 본질에 충실해 주길 바라고 원칙을 가지고 상식위에서 목회해 주길 고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목회자가 그런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내 세운 본질과 원칙과 상식이 나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이라고 믿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진짜 그런 사람이라면 오히려 환영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자기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원칙주의자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목회를 위해 원칙과 본질, 상식을 붙잡아 보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드라마의 끝을 보면서 문득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이렇게 목회하면 반드시 교회가 성장하고 성공적인 목회가 될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는 정직하면 형통하고, 원칙을 지키면 소위 목회가 성공할 것이라는 부인하고 싶지 않은 기대가 제 마음 밑바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 하나 깨달았습니다. 원칙을 지키고 본질에 충실하고 상식에 따라 목회해도 때로는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장보고나 이순신처럼 비참하게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 길을 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원칙이나 본질, 상식이 성공을 위한 수단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결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가야겠습니다.
  • profile
    목사님! 그냥 감동으로만 끝날 수 있는 드라마를 보고도 사고의 깊은 샘물을 끌어 올리시는 목사님의 영혼의 산고 에 깊은 감명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저도 본질과 원칙은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질을 지키기 위해 원칙을 세우고, 원칙 때문에 본질이 유지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결과에 연연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의 몫이고, 우리 믿는 자들은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즉 과정을 더욱 중요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다운 교회의 홈페이지를 보면서 목사님의 개성을 함께 보는 것 같아 더욱 즐겁습니다. 앞으로 자주 들리겠습니다. 샬롬!
제목 날짜
836차 평신도를 위한 가정교회 세미나 & 다운공동체교회 미니연수 안내 (11월 15~17일) 2024.03.26
목회칼럼은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단 댓글은 실명(로그인)으로만 쓸수 있습니다. 2020.06.19
7월 24일 칼럼 /위대한 여름을 위하여   2005.07.28
교역자 특새 후기   2008.08.31
목자목녀들 꼭 보시고 문자로 답주세요!   2012.12.05
풍성한 추석 보내십시오 (1)   2006.09.30
헌신대 앞으로 나오십시오   2011.03.25
"'믿는 사람 안 받는다'는 말 사용하지 마세요" (이수관 목사)   2015.09.23
"예수영접모임”이 달라집니다.   2014.03.14
<경건의삶>을 소개합니다. (1)   2012.02.28
<라이즈업 울산>을 소개합니다.   2012.03.15
<청년교회목사 칼럼> 피곤함을 이기는 은혜를 사모하며-동계수련회   2010.02.04
<확신의 삶>을 해야 하는 이유   2012.01.26
"건널 수 없는 강과 비옥한 평야"   2018.04.06
"고난주간"에 시선을 모아주세요!   2011.04.15
"미세스 쏭"을 무시하지 말아주세요! (1)   2009.07.11
"바르게 미칩시다"   2018.01.20
"아듀(Adieu)" 무거동 시대! (1)   2017.07.22
1.2부 예배의 균형을 위한 당부   2019.09.21
10년을 잘 마감하고 앞으로 10년을 위하여   2013.12.14
10월 15일 CGV 영화관에서 갖는 추수감사절 VIP 초청 주일 못 올 이유가 없습니다!   2017.09.30
10월 2일 칼럼 “33절의 주인공이 되자” (1)   2005.10.01